오클라호마 시티의 지역신문 오클라호만에 올라온 닉 칼리슨 관련 기사입니다.
꽤 오래전에 나온 기사인데, 내용이 괜찮아서 즐겨찾기 해놓고 틈틈히 해석하다보니 이제서야 올리게 되었네요. 물론 제 영어 실력이 일천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요.
번역 실력이 부족한 관계로 오역과 의역이 난무합니다.
애매하다 싶으면 링크되어 있는 원문을 확인해주시고, 지적해주시면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원문보러가기)
그러면 시작합니다.
닉 칼리슨은 어떻게 꼭 필요한 롤 플레이어가 되었는가?
자신의 이름 옆에 보여지는 스탯에 신경을 쓰던 시절, 닉 칼리슨은 그의 침실 문에 한 장의 박스스코어를 붙여놓았다.
그는 그 박스스코어에 있는 자신의 스탯에 줄을 그어놓고, 방을 나설때마다 그것을 보았다.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3득점, 필드골 1-6, 자유투 1-2, 파울 5
닉 칼리슨이 이아오와 폴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주 토너먼트 1라운드에서 3점차로 패하면서 닉 칼리슨의 첫시즌은 상심속에 끝났다. 그 경기에서 칼리슨은 더 크고, 강하고 피지컬한 포스트 플레이어에게 계속해서 농락을 당했고, 위의 박스 스코어를 보며 다시는 그런 패배를 당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매일 떠올렸다.
"제 플레이는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실망시킨것처럼 느껴졌죠. 그건 저에게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저의 관점을 전체적으로 바꿔놨죠. 농구를 실제로 진지하게 대하기 시작했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습니다." - 닉 칼리슨
우리가 오늘날 보고 있는 선수는 17년 전 봄 바로 이날 태어났다.
칼리슨은 지금 오클라호마 시티 썬더에서 열심히 플레이하고 있다. 그는 초창기에 학습했던 것들을 이용해 NBA로 향하는 길을 꾸준히 닦아왔고, NBA에서 없어서는 안될 투지넘치는 롤 플레이어, 글루 가이(glue guy)가 되었다.
팀동료들은 그를 믿는다. 코치들은 그를 아낀다. 단장들은 그와 같은 선수들을 데려오고 싶어한다.
이것이 칼리슨이 한 프랜차이즈에서 10시즌을 보낸 8명의 선수중에 한명인 이유다. 나머지 7명의 선수중에 6명의 선수가 최소 한번 이상 올스타에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닉 칼리슨을 아주 희귀한 존재이고, 저력을 가진 전형적인 롤플레이어로 만들어준다.
그는 연고지 이전, 리빌딩, 5명의 감독 교체, 두명의 단장 교체, 부상, 노쇠화, 패배, 승리, 직장폐쇄를 이겨냈다.
"누군가가 그렇게 오래 버티는 것이 실제로는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까지 성공을 하려면, 좋은 팀을 만들어야하죠. 그것이 제가 하고자하는 바입니다. " - 닉 칼리슨
칼리슨은 대부분의 팬들이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썬더에 의미한다. 썬더의 단장 샘 프레스티는 칼리슨을 창립 멤버로 부르며, 올스타인 케빈 듀란트, 러셀 웨스트브룩과 같은 수준에 올려놓는다. 코트 위에서, 연습에서, 경기에서 그가 팀에 쏟는 헌신과, 지역사회 리더로 그가 매일 보여주는 사례들을 통해, 닉 칼리슨은 오클라호마 시티가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정체성을 확립하고, 문화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다.
간단히 말하면, 칼리슨은 앞으로 썬더의 롤 플레이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지금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 조직이 궁극적으로 구현하고자하는 타입의 선수입니다." - 오클라호마 시티 썬더 GM 샘 프레스티.
닉 칼리슨이 오클라호마 시티의 사랑을 받고, 팬들이 좋아하는 선수가 된 이유는 닉의 공격자 파울 유도나, 슈터들에게 오픈 찬스를 만들어주기 위한 스크린, 리바운드에 대한 열망과 루즈볼을 위해 코트에 몸을 날리는 의지 뿐만 아니라 그의 비이기적인 태도와 그가 매일 보여주는 궃은 일을 마다하지않는 블루-컬러의 모습 때문이다.
5분을 뛰던, 35분을 뛰던, 칼리슨은 최선을 다한하는 믿음을 준다. 그리고 전혀 불평하지 않는다.
오클라호마 시티 썬더의 홈 구장인 체사피크 에너지 아레나 안에서, 이런 정신은 존경받고,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이것은 칼리슨이 자신의 전매특허인 허슬플레이를 할 때마다 나오는 엄청난 함성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제가 하는 플레이가 인정을 받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저같은 플레이어에게 그것은 아주 드문일이죠. 평균 4득점, 4리바운드를 기록하는 저같은 롤 플레이어에 대해서, 아무도 두 번씩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나 저는 아주 특별한 곳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항상 감사하고 있죠." - 닉 칼리슨
* * *
닉의 아버지 데이브 칼리슨은 "롤 플레이어"라는 문구를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이 문구를 그의 아들에 대한 에둘러 말하는 칭찬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보기에 닉은 팀 플레이어입니다. 저는 그 단어를 더 좋아해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역할이 있기 때문이죠. 그는 자신의 역할 혹은 자신의 일이 팀이 승리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하려고하는 일이죠. 그것이 무엇이든지요" - 데이브 칼리슨.
데이브는 어느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아이오와의 학교에서 오랫동안 감독을 하면서, 데이브 칼리슨은 고등학교 마지막 3년동안 닉을 지도했다. 그 이전 시기에, 데이브는 닉이 결과적으로 게임을 사랑하게 된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닉의 농구에 대한 강한 관심은 그의 아버지의 팀에서 물주전자를 나르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공격자파울 유도를 포함해서 큰 선수들이 하는 것을 흉내내면서 농구팀 주변에 머무르는 것을 좋아했다.
7살이 되었을 때, 닉은 아버지와 함께 경기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닉은 왜 어떤일이 일어나게되는지 항상 궁금해했어요. 지금 하는 것을 왜 해야하는지도요" 데이브 칼리슨
실망한 데이브가 집에 돌아와서 그의 부인에게 어려운 일들, 형편없는 연습, 순탄하지 않았던 경기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날들이 있었다. 닉은 이런 이야기들을 언제나 빠지지않고 들었다. 그는 노력하는 플레이, 비이기적인 플레이의 중요성을 본능적으로 알게되었다. 만약 어떤 선수가 비어있다면, 그에게 패스해라. 닉이 배운 것이다. 만약 수비를 해야한다면, 자세를 낮춰라.
농구센스 측면에서 닉 칼리슨은 이런 밤들을 통해 나쁜 점들로부터 옳은 점들을 배웠고, 감독들이 너무너무 원하는 점도 배웠다.
"선수가 되기 위해서 해서는 안될 것들을 보거나 혹은 선수가 되기 위해서 해야할 것들을 본 거죠." - 닉 칼리슨
* * *
닉 칼리슨은 그가 되고자했던 타입의 선수나 사람에 대해 많은 선택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닉 칼리슨이 자랐던 작은 아이오와 타운이나, 이이오와 폴스에 이사오기 전에 가족이 살았던 포트 닷지에서 닉은 겸손함을 배울 수 밖에 없었다. 닉이 기억하는 방식대로라면, 당신은 비싼 옷을 입었다고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어리고, 자만심이 가득한데 그것을 밖으로 표현하면, 사람들은 그걸 비웃었죠. 그래서 저는 자만심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정말 노력했습니다." - 닉 칼리슨.
아이오와에서 농구는 모든 면에서 아주 간단명료했다.
"아이오와에는 무시무시한 운동선수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이곳의 많은 감독들은 성공하기 위해서는 실행능력이 있어야했어요."-데이브 칼리슨
데이브는 고등학교 4년동안 자신의 아들을 지도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냈다. 대신 그는 기본기를 더 가다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랜디 피스커스 감독의 1학년 팀에 닉을 집어넣었다. 피스커스는 아주 터프한 코치였으며 데이브가 했던 혹은 원했던 것 이상으로 닉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배우면, 그 방법대로 해야만햇죠.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하면, 한소리 들어야 했습니다." - 닉 칼리슨.
2년차에 들어갔을 때, 닉은 6-2에서 6-7로 키가 자랐다. 하지만 기본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데이브는 이점을 확신했다.
데이브는 그의 팀원들에게 공격자 파울 유도는 농구에서 가장 대단한 플레이라고 가르쳤다. 수비를 성공시키고, 상대편 선수에게 파울을 안기고, 공격권까지 가져올 수 있다.
데이브는 닉과 동료들이 4번 연속으로 수비를 성공해야만하는 연습을 진행했다. 공격자 파울을 유도해내면 두 번의 수비가 성공한 것으로 계산해줬다. 데이브는 팀이 두번의 수비가 필요할때 닉 칼리슨이 공격자 파울을 유도해내리라고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닉 칼리슨이 주니어와 시니어 시절 6-9의 대단한 포스트 플레이어가 되었어도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닉 칼리슨에게 공격자 파울유도를 시키는 것에 대해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건 마치 오클라호마 시티 썬더가 서르지 이바카에게 '블록슛은 그만하고 공격자 파울을 유도해!' 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하지만 닉은 공격자 파울 유도를 정말 잘했습니다. 예측력이 정말 좋았죠." - 데이브 칼리슨
* * *
기본기가 탄탄하다고 칭송받는 선수가 본인이 임팩트있는 선수로 변모한 것에 대해 아마추어 농구(AAU Basketball)에 공적을 돌리리라곤 당신이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닉 칼리슨은 그렇게 말한다.
주 토너먼트에서 안타깝게 패하고 난 뒤 여름, 칼리슨은 여름 순회경기를 시작했다. 패배의 고통은 그를 농구 몰두하고 있는 10대로 변모시켰다.
칼리슨은 자신의 팀 아이오와 마틴 브로스와 함께 전국 토너먼트에서 플레이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카고에서 주말을 보내며 강한 상대들과 경기를 펼쳤다. 그들이 전에 볼 수 없었던 그런 선수들이었다. 미래의 NBA 선수인 스티븐 헌터, 퀸틴 리차드슨, 대리어스 마일즈.
경기들을 통해서 칼리슨은 눈을 뜨게 되었고, 스스로 얼마나 더 열심히 노력해야하는지 확신하게 되었다.
이 한 달 동안 자신의 게임이 지난 2년에 비해 더 많은 발전을 이뤘다고 칼리슨은 말한다.
오전 6:30에 웨이트 트레이닝은 규칙이 되었고, 파울 콜 없이 동료들과 픽업 게임을 시작했다. 칼리슨은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버지를 위해 주 챔피언이 되길 원했다. 아버지 데이브는 한번도 챔피언이 된 적이 없었다. 그러고 닉은 대학에서도 플레이하고 싶었다.
닉은 자신이 충분하지 않다는 끊임없고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끈질긴 근면성(work ethic)을 발전시켰다.
이후 2년동안 칼리슨은 아이오와 폴스를 2년 연속 26승 무패로 이끌었고, 주 챔피언을 차지했다.
* * *
칼리슨이 항상 살림꾼(glue guy) 타입의 선수는 아니었다는 것은 쉽게 잊혀지는 사실이다.
이것은 NBA 경력을 이어오면서 그가 변화에 너무 잘 적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닉 칼리슨도 하이스쿨 맥도널드 올 아메리칸 출신이고, 캔사스 대학 에서 뛰면서 Big 12 올해의 선수, NABC 올해의 선수에 뽑히던 시절이 있었다.
닉은 어깨 부상으로 자신의 루키 시즌인 2003-2004 시즌을 모두 결장한 뒤에 지금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되었다.
갑자기 실패의 두려움이 다시 들었다.
그는 출전시간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겠다고 결정했고, 강력한 스크린 세터가 되기위해 자기자신을 헌신했다. 당시 레이 앨런은 시애틀의 스타였고 리그 최고의 슈팅가드 중에 한명이었다. 칼리슨은 레이 앨런에게 가능한한 많은 오픈 찬스를 만들어 주는 것을 임무로 삼았다.
"그 덕분에 저는 코트에 머물 수 있었죠." - 닉 칼리슨
이것은 또한 지금 칼리슨이 웨스트브룩과 듀란트를 위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좋은 연습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칼리슨은 대부분의 젊은 선수들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슛이 들어갔는지 여부를 활약의 근거로 삼았다. 그것은 불일치를 가져왔다.
"다른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그 다른 부분을 잘해내는 지점에 이르게 된거죠. 그리고 만약 내가 그 부분들을 잘해내면, 내가 플레이한 부분에 대해서는 만족하게 느끼는 거죠." - 닉 칼리슨
칼리슨은 게임의 세부 요인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픽 앤 롤 플레이에 초점을 맞췄다. 수비에서 그는 이른 커버를 통해 볼 핸들러가 돌파를 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슛을 던지지 못하게하는데 집중했다. 공격에서는 아버지가 한때 가르쳐주었던 각도들은 수비수들이 볼을 사이드라인으로 몰아갈때 수비수들을 중앙경로로 향하도록 유도하게 하는 요령을 알게 해주었다.
"같은 방법으로 케빈은 득점을 합니다. 그게 바로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죠. 저는 이 이부분을 맡아서 하는 거죠." - 닉 칼리슨
칼리슨의 몇몇 기술들은 환경때문이기도 하다.
2009년 트레이닝 캠프 시작전에 당한 심한 발목부상으로, 닉은 트레이닝 캠프 전체와 첫 4번의 프리시즌 경기를 결장했다. 기동력은 저하되었고 폭발적인 움직임도 증발되었다. 이것은 칼리슨으로 하여금 더 많은 공격자 파울을 유도하게 만들었다. 닉은 리바운드를 좇는 것보다 박스아웃을 하기 시작했다.
"운동능력이 떨어졌음을 느꼈죠. 그래서 다른 일들을 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닉 칼리슨.
* * *
칼리슨은 프로 농구계가 빠르게 변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만큼 오래 리그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변화에서 벗어나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숙하지도 않다.
"누가 알겠어요? 샘 프레스티 GM이 7년전 마지막에 틀어진 트레이드에 저를 포함시켰을 수도 있어요. 저는 가능하면 여기에 오래있고 싶어요. 이곳에서 아주 편안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반면에 제가 다른 팀으로 간다면, 저는 단시 다른 사람이 되는거죠." - 닉 칼리슨.
그동안 프레스티 GM의 계획은 칼리슨을 붙잡는 것이었다.
소닉스/썬더가 두시즌동안 43승 밖에 못거뒀던 2007~09시즌부터 프레스티는 칼리슨과 개인적인 대화를 많이 나눴다. 프레스티는 그의 파워포워드에게 더 나아질 것을 약속했다. 그는 그들이 얼마나 칼리슨을 원하는지 강조했었다.
"그가 우리팀에 있다는 것은 정말 운이 좋은 겁니다. 이 조직의 모든 성공에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닉의 이런 손길은 앞으로도 저력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 샘 프레스티.
그러나 칼리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는 챔피언이 되길 원한다.
"제가 항상 원해왔던 것, 사람들에게 '나는 챔피언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우승반지를 보여줄 수 있는 것 반드시 그것때문만은 아닙니다. 그저 무슨 느낌인지 알고 싶어요. 우승 파티가 어떤 것인지, 우승 퍼레이드가 어떤 느낌일지 알고 싶죠. 제가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했던 이런 기억들입니다." - 닉 칼리슨.
여기에는 오클라호마의 주민들도 포함된다. 닉 칼리슨이 6년전에 와서 만난 오클라호마 주민들은 예상하지 못했던 조건없는 지지를 그에게 보내주었고, 정말로 특별함이 있는 흔하지 않는 커리어를 완성해나가고 있다.
"모든 주민들 덕분에 이곳에서 했던 일들은 아주 쿨합니다. 우리는 여기 오래있었죠. 우리는 리그 최악의 팀들 중에 하나에서 시작해서 지금 기회를 잡고 있습니다. 정말로 제가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이죠." - 닉 칼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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